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표트르 1세 (문단 편집) === 비판 === 중요한 점은 다른 누구도 아닌 '''표트르의 후손인 이후 러시아 황제들과 차르주의자들이 표트르 1세를 폭군이자 계몽자로서의 양면성이 존재하는 복잡한 인물로 평가했다'''[* [[니콜라이 2세]]의 경우는 표트르 1세를 자신이 가장 덜 좋아하는 선조라고 언급했다]는 점이다. 오히려 반체제적 성향이 짙었던 사회주의자, 서구주의자들이 표트르 1세를 칭송하거나 고평가했을 정도다. 즉 바로 그 제정 시대에서부터 평가가 극도로 갈리는 인물이었다. 사실 표트르의 개혁은 어디까지나 왕권을 제약하는 [[보야르]]들을 타도하고 표트르 1세의 왕권을 강화하는데에만 그 목적이 있었지 백성들을 위하지는 않았다. 특히 개혁을 시행하는 와중에 벌인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 사업, [[근대화]] 정책은 많은 비용이 드는데 이 당시 러시아는 그것을 감당할만한 경제력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표트르 1세는 귀족과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여해서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려 했는데 이러한 이유로 귀족과 백성들의 개혁에 대한 불만이 상당했다. 무엇보다도 표트르는 근대화를 추진했지만 정작 유럽의 선진적인 정치 체제를 도입하는데 매우 소극적이였다. 특히 유럽 국가들의 놀라운 발전의 근원이 사유 재산의 보호와 같은 시민의 권리와 자유, 군주의 권력 제한, 지방자치가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는 표트르와 러시아 제국이 범한 중대한 실수였고 크나큰 비극이 된다. 다만 이 당시에는 [[베네치아]], [[네덜란드]], [[제노바]] 등의 [[공화국]]들은 여럿 존재했지만 이들 공화국들도 [[참정권]]이 귀족 내지 상류층이나 가질 수 있었던 현대 기준에서 [[과두정]]이었고, [[보통선거]] 개념은 생소한 것이었다. 따라서 [[시민권]]과 [[자유]], [[사유재산권]]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건 귀족 계층밖에 없었다. 사실 표트르 1세가 저걸 인정하지 않은 이유는 '''전제군주로서 [[봉건]]귀족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은 것'''에 가깝다. 훗날 러시아 제국의 차르와 보수주의자들이 전제권력에 집착한 이유도 비슷하다. 왕권이 약화되면 귀족이 자유를 얻게 되고, 이 귀족들은 농노를 마음대로 착취하고, 분노한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켜서 국가가 망하게 되니, 이러한 결과를 피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왕권이 존재해야 한다는 논리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것. 실제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이 쇠퇴의 길을 걸은것도 귀족들의 권한이 너무 세져서 국왕도 제대로 견제를 못했기 때문이었다. 괜히 표트르의 죽음 이후 러시아의 사회 개혁 움직임이 크게 후퇴한게 아니다. 제국 내 농노, 이민족 뿐 아니라 귀족, 성직자들도 그야말로 차르의 강압 속에서 시달릴대로 시달려서 지쳤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와 관련해서 전반적으로 복잡한 평가다. 표트르 1세는 [[대북방전쟁]] 당시 [[칼 12세]]와 손잡고 대항했던 [[카자크]] 헤트만 [[이반 마제파]]를 제압하고 카자크들을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사에 동원하거나 카자크 자치권을 제한했다. 그러나 당시의 카자크들은 동일 집단이거나 [[우크라이나인]] 전체를 대표하는 존재는 아니었고 오히려 같은 카자크끼리 혹은 농민들과 싸우는 경우도 많았다. 단적으로 마제파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표트르 편을 든 충성파 카자크 지도자들 중에서도 현재까지 우크라이나에서 위인으로 존경받는 이들이 있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역사가 니콜라이 코스토마로프는 표트르 1세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가혹하게 통치했으며 개혁에도 많은 한계가 있었고 여러 실책과 악행을 저질렀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표트르에게도 달리 다른 선택지가 없었으며 국가를 위함이었지 사익을 위함은 아니었다고 선을 그었고 또한 우크라이나의 계몽과 발전을 이끌고 특히 [[우크라이나인]]들에 대한 차별을 막은 것은 호평하는 등 나름대로의 복잡한 역할과 명암이 있는 인물로 평가했다.[* 이러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평가는 당시 표트르의 대척점으로 올려진 이반 마제파가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제대로 된 위인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다. 사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적 사관으로 너무 이상화되거나 일부 예외적인 인물들이 띄워져서 그렇지 오히려 당시 카자크들은 대부분은 마적단, 지방군벌에 가장 가까운 존재들이었고 적지 않은 농노를 착취하는 폴란드 슐라흐타와 별 차이 없이 카자크 지도자들은 당대 우크라이나인들로부터도 증오의 대상이었다. 단적으로 표트르 1세가 우크라이나 카자크들을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사에 동원했다고 하지만 우크라이나 내 정적들을 숙청하고 차르의 신임을 얻기 위해 이걸 적극적으로 이용한 인물이 바로 마제파였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어디까지 주도했는지에 대한 논란은 있을 수 있어도 이는 러시아령 우크라이나의 가장 강력한 봉건[[영주]]의 협력이 없으면 불가능했으며 마제파가 표트르 1세의 가장 적극적인 동조자이자 수혜자였다는 점은 부정하기 힘들다. 때문에 마제파는 소련 해체 이후 민족 영웅으로 떠받들어졌지만 생전에는 친러와 반러를 막론하고 우크라이나인에게도 평이 좋은 인물은 아니었다. 코스토마로프는 사실상 [[폴란드인]]인 마제파는 러시아도 우크라이나도 진심으로 조국이라 생각치 않았으며 자신의 사익만을 위해 차르에게 충성하며 소러시아인들을 착취했고 자신의 사익이 위협받자 차르를 배신하고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구실로 사람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킨 철저한 이기주의자라고 비난했다. 때문에 마제파의 봉기는 후대의 민족주의적 사관에 의해 러시아 지배에 대항하는 우크라이나의 저항이라는 이미지가 덧붙여졌을뿐 실제로는 '''전제군주와 봉건영주의 충돌''' 정도로 여겨진다.] 사실 표트르 1세의 우크라이나 정책은 모순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 전제군주정을 추구하면서 가장 강력한 봉건세력인 자포리자 카자크들을 자치권을 철폐했으며 반면 서구화 정책을 추구하고 전통적인 러시아 대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옛 소러시아인, 폴란드인 적극적으로 등용해야 했다. 즉 의도에 있어서 철저하게 전체적인 국익에 따라 행동했고 특정 민족에 대한 편애나 차별은 아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